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 춘(春) 정월에 창건되었으며 신라 경도(京都)내 7가람 중의 하나이다. 35대 경덕왕(景德王) 14년(775)에 약사동상(藥師銅像)을 조성하였는데 장인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분황사는 임진왜란시에 소실되어서 후에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경내에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模塼石塔), 석정(石井), 석조(石槽), 초석, 석등 대석 등이 남아 있으며 절의 남쪽 바깥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현재 보광전(普光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으며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내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다.
분황사는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살다 간 곳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고내말(强古乃末)이 구리 36만 6천 7백근을 들여 만들었다고 하는 약사여래불상이 안치되었던 곳이요,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를 그려 유명한 솔거의 관세음보살상벽화가 있던 곳이요, 또 희명과 그의 어린이가 천수관세음보살상 앞에서 향가를 뇌던 곳이며, 지금도 남아 있는 돌우물에는 호국용이 살아서 호국사찰의 이름을 얻었다. 또한 신라시대 석탑으로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모전석탑이 있으며 이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5년, 현재 분황사 뒤쪽 부근 웅덩이에서 많은 양의 석불들이 발견되었는데 좌불 13점, 광배 1점, 기타 6점이며 이들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원효대사(A.D. 617-686)는 해동종을 창시하였는데, 이것을 또 분황종이라고 할 만큼 이 절은 원효대사와 깊은 인연이 맺어진 곳이다. 원효대사가 입적하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공경하며 예배를 올렸다. 그가 예배할 때 마다 소상(塑像)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설총이 그의 아버지를 얼마나 극진히 사모했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이 상은 처음부터 그를 사모하는 사람이면 누구를 향해서나 돌아다 보는 그러한 상으로서 만들어졌던 것이리라. 지금은 원효의 소상이 없지만 그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관련하여 한층 더 따스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는 이 절에 살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화엄경소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