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임금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離宮)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지금 이궁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구가 유상곡수(流觴曲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詩를 짓는 놀이)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이곳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헌강왕과 연관된 이야기 속에서 보인다. 혼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향연을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며 왕은 신이 돌아간 후 신하들 앞에서 그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춤을 어무상심무(御舞詳諶舞)라 하였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석구의 폭이 평균 약 31㎝, 깊이가 약 22㎝, 총 길이는 22m 정도이다. 이것은 신라 궁원예술의 특이한 상징이며,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자연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한 궁궐인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계곡의 물을 끌어 들여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조성한 것으로 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모양의 돌이 있었다고 하나 1871~1873년 사이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간 후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거북이 토해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을 받는 둥근 모양의 석조와 여기서 시작해 굽이굽이 돌아 타원형을 그리며 되돌아가는 수로만이 있을 뿐이다.
시라 혜공왕 이후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시대가 내려 갈수록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제도하기 보다는 저만의 안락을 탐구했던 왕실의 차락상은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던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포석정의 애화(哀話)도 결국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교훈적 사실이라 하겠다.
경애왕 4년(927) 11월, 왕은 비빈, 종친 등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견원의 군사가 쳐들어왔고 왕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경순왕을 왕으로 세우고 신라의 재주 많은 사람을 데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였고, 천년영화의 막을 내렸다.
참고자료 : 경주문화관광총서 주제별로 떠나는 경주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