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읍에서 육통리 북쪽의 소나무숲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규모는 지름 20.8m, 높이 6m로 비교적 큰 원형봉토분이다. 무덤 밑둘레를 따라 병풍처럼 다듬은 판석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을 마련하였다. 판석 사이사이에는 탱석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키고 판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을 올려 보호석을 마무리하였다.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또한 호석 밑둘레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띄워 방사선으로 깐돌을 깔았고 주변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은 많이 없어졌다. 난간기둥에는 위아래에 둥글게 구멍을 뚫어 기둥돌을 끼웠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무덤 앞엔 좌우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또한 무덤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인 귀부가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고 비신과 그 위에 얹어 놓은 이수는 없어졌다. 표식물의 양식 및 배치로 보아 괘릉을 많이 모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이름은 수종(秀宗) 혹은 경휘(景徽)라고 한다.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왕위쟁탈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활약하였다. 뒤에 헌덕왕으로 불리우는 김언승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뒤 상대등이 되었고 3년 뒤에는 부군(副君)이 되었다가 헌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10년간 재위해 있으면서 장보고의 건의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고, 복식 등 골품제의 규정을 재확인하는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왕의 유언에 따라 먼저 죽은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흥덕(興德)"이라는 제액을 비롯한 수많은 파편이 수습되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신라 왕릉 중 피장자가 확인된 몇 안되는 무덤 중의 하나이다.